책 일기/사랑인간관계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을 읽고,

tea_pot 2021. 9. 8. 20:52

이 책을 읽은지 거의 6개월이 넘어간다.
누군가에 대해 사랑을 주고받아본 적이 많이 없어 서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점에 가서 한 한시간 동안 쭉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이란게 원래 필요한 순간에 제일 잘읽히고,
내 상황(context)를 대입해가며 읽다보니,
공감가는 구절이 몇몇 구절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의 기술, p14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 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랑의 기술, p17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빌고 밀접하게 느끼며, 일체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격양된 경험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의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20대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막연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래의 구절처럼, 어떻게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 감정에 빠질 수 있을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위해 외모에 치중하고, 잘보이기위해서만 노력한 시기였고,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했었다. (물론 나의 외적인 모습을 가꾸는걸 배우는 시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만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정말 미안할 일만 많이 만들었기도 했다.
나는 남에게 집중하고있다고 생각했지만, 남이 아닌, 남에게 보여지는 나에게만 집중하고있었다.

그 때 상대와의 만남이 깊어졌었다면, 내 외모를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더 좋은 모습만 포장하는 내가 되지 않았을까.
책의 말처럼 그냥 외로웠을 뿐이었고, 남들이 다 하니까 해보고 싶은 그런 욕심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성숙한 사랑의 감정을 교류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에 취해 너무 격양되어 짜릿한 순간도 필요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순간도 그만큼 중요한 것 같다.

사랑의 기술, p24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될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분리되어 흩어져있는 인간의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런 지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사랑의 기술, p40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중략)..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코로나로 인해 단절된 관계, 교류로 인해 유난히 불안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일이 잦다.
그런 외로움이나 불안을 내가 잘 느끼는 사람인 것 같기도하고, 늘 혼자라고 인지하고있지만, 혼자가 되기 싫어하는 마음이 늘 공존한다.
뭔가 책속에서 늘 불안은 존재하는 것이고, 확실한 것은 몇 없다는 말이 맘에 많이 와닿았던 것 같다.

20대는 내가 원하면 충분히 친구를 찾기 쉬운 나이 대이기에, 주로 나에게 사랑은 연인간의 감정교류가 아니라, 주로 친구간의 교류로 많이 채워졌었다.
(책에서 말한 것 다수의 불안 요소들에 비해 이 불안을 채울 수 있는 것 굉장히 적은 것 같다.)
위의 글 처럼 어쩌면 그 과정은 내 불안으로부터 회피하고, 끊임없이 세계와 교류하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로 같은 경험을 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을 나누면서 내 불안을 그렇게 해소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불안을 해소하기위한 친구, 연인 등과의 교류에서 또 다른 불안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같이하는 것보다 혼자서 그 불안을 견디는게 더 나을 수도있겠다, 싶은 요즘
책은 그럼에도 너는 혼자 그걸 다 견디다 결국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될걸? 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두 독립된 객체가 합일을 이룬다라,, 실은 저게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사람이 하나에서 둘이되면 상대방에 양보하고,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살짝씩 자기 자신의 모습이 깎여나간다고 느낀다.
그 정도가 얼마나이냐에 따라 또 다르겠지만,
크고 작음을 다 겪은 나로서는, 저 문장에 좀 회의적이다.
어쨋든 완전한 개성유지는 좀 어렵다고 생각하는 입장.

사랑의 기술, p42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가장 광범하게 퍼져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성격상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 성격의 사람은 주려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할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의 기술, p43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며,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있기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사랑의 기술, p46
그러나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에게서 배우고, 배우는 관객들로 부터 자극을 받고,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해 그들이 서로 대상으로 다루지않고 서로 성실하고 생산적으로 관계한다면, 치유된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행복의 감정은 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이 느꼈던 감정이다.
내 스스로가 굉장히 대단한 거를 갖고있다는 생각이 안드는데,
- 내가 공유해준 사소한 나의 경험이 외국인 유학생 친구들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말이었었고,
- 나의 조그만 도움으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교육봉사 학생들을 지켜보면서도 그러했다.

친구들사이에 있어서도,
-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얘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조금 그 친구의 마음이 편해지고,
- 후배가 도움을 요청할 때, 그 도움을 주면서 그 친구가 내가 겪은 고통을 조금은 덜 겪는다는 사실이 기쁘게 느껴지곤했다. 그래서 지금도 회사에서의 멘토링이나 도움을 청하는 후배들의 연락은 언제나 okay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런데 학습된 경험때문인지,
누군가가 내게 주는 행위에 있어서 계산을 하고 있다거나,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나는 극도로 비생산적인 사람의 태도를 취했다.
실은 그 느낌이 맞는지 틀린지는 상대방만 알테니 알 길이없지만, 내 느낌이 중요했다.

사랑의 기술, p50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면 공허할 것이다."

사랑의 기술, p(까먹음)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못한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나를 발견하고.."

누군가를 존경하려면,
- 우선 그 사람을 알고자하는 관심이 있어야하고,
- 관심으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 그 사람의 톡특한 개성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마음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나역시도 나의 개성을 알고 발달해나가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게 된다.

과거에 자신에 대한 존경이 없다는 연인의 말을 들은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 난 누군가를 존경하기 전에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했었고,
- 그 역시도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을 내어주지 못한채 성급하게 요구했었던 것 같다.

재밌는게,
상대방을 알아가고, 합일되는 그런 경험을 얻고자했었던 끈임없는 나의 성찰은 결국 내 자신만 더 잘 알게 해주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알고자한 것은 상대방이었는데, 나를 더 잘 알게된다.

사랑의 기술, p74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사랑의 기술, p75
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결국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인 것 같다 ㅋㅋ

p92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자신을 미워한다.
자기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 그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생활에서 만족을 얻기위해 초조해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을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p94
예컨테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어진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지만, 사실은 자신의 관심의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어있는 적의를 갖고있다. 이 어머니는 자식을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려고 지나친 관심을 갖는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결핍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며,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않은 사람이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p158
세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다시말하지만 기술에 숙달하려고 해본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일을 달성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못한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 인내는 훈련이나 정신집중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우리는 모든 산업 조직은 정반대의 것, 곧 신속성을 추구한다. (중략) 기계에 대해 좋은 것은 인간에 대해서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p159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알지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통 기술을 간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대부분 그 기술을 배우기 전에 관계없는 듯한 일부터 배워야한다.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한다.


두가지 얘기가 다른 깨달음을 주는데,
우리는 과연 기계가 준 신속성으로 저축한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고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그것은 인내를 요하고, 간접적으로 천천히 시작을 해야하나 노력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게 쉽지않다.

사랑의 기술, p74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사랑의 기술, p75
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나의 관점이 아닌 상대방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있는 것 같다. 실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을 경험해보지않고 이를 객관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위선처럼 보여질 수 있지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이 기술을 터득하는 것은 긴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하는 것 같다.